김치의 혁명: 18세기 조선, '담저법'에서 '포저법'으로
[K-Food 뿌리 05] 18세기 김치의 혁명: 담저법[沈菹法, Submerging method]과 포저법[泡菹法/包菹法, Stuffing method]의 차이
늦가을 김장철 김치, 소금에 푹 절여진 배추의 노란 잎을 벌려 그 사이사이에 붉은 양념을 빈틈없이 채워 넣는 풍경.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가슴 한구석이 따뜻해지는 친숙한 장면입니다. 제가 어릴 적만 해도 어머니 곁에 쪼그려 앉아 양념이 듬뿍 발린 겉절이 한 입을 받아먹기 위해 제비 새끼처럼 입을 벌리곤 했습니다. 놀랍게도 이토록 친숙한 배추 속 넣기 방식이 수천 년 김치 역사에서 그리 오래된 조리법이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하고 큰 흥미를 느꼈습니다. 맑은 소금물에 채소를 가라앉히던 선조들의 지혜가 어떻게 붉은 양념을 품은 김치의 예술적 진화와 그 식문화의 변화를 쫓아보았습니다.
1. 단순한 담금, '담저법'의 시대
조선 전기까지만 해도 우리의 김치 담금법은 채소를 소금물이나 간장에 담가두는 방식이 주를 이루었습니다. 이를 학술적인 용어로 담저법[沈菹法, Submerging method]이라고 부릅니다. 채소가 상하는 것을 막기 위해 높은 농도의 소금물에 채소를 통째로 가라앉혀 자체적인 유산균 발효를 유도하는 방식입니다.
15세기 중반에 편찬된 농서이자 조리서인 『산가요록[山家要錄, 1450]』이나 1483년의 『사시찬요초[四時纂要抄]』를 살펴보면, 당시의 김치는 오이, 가지, 무 등을 소금이나 장[醬, Soy sauce]에 절여 국물과 함께 먹는 동치미나 나박김치, 짠지의 형태가 대부분이었습니다.[서지학연구, 2018]
당시에는 고추가 없었기 때문에 산초[山椒, Prickly ash]나 천초[川椒, Sichuan pepper]로 톡 쏘는 맛을 더하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핵심 포인트
조선시대 김치 담금법의 진화
단순 염장(담저법) → 고추와 젓갈의 도입 → 복합 양념과 속 넣기(포저법)의 완성
2. 18세기, 양념 김치의 화려한 등장
오랜 세월 유지되던 담저법에 지각변동이 일어난 것은 18세기에 접어들면서부터입니다. 임진왜란 이후 유입된 고추[Gochu, Chili pepper]가 100여 년의 적응기를 거쳐 본격적으로 식탁의 주인공으로 등극했기 때문입니다.
1740년경 쓰인 『수문사설[謏聞事說, Somunsaseol]』을 들여다보면, 김치에 젓갈(새우젓 등)과 고춧가루를 함께 활용한 기록이 최초로 확인됩니다.
[서지학연구, 2018] [더 알아보기]
고추의 강력한 항균 작용 덕분에 쉽게 상하던 해산물 젓갈[Jeotgal, Salted seafood]을 듬뿍 넣을 수 있게 되었고, 젓갈의 동물성 단백질이 발효되면서 폭발적인 감칠맛을 만들어내기 시작했습니다.
[조선시대 젓갈 활용과 김치 조리법의 변천, 2024]
3. 배추 잎에 양념을 품다, '포저법'의 탄생
고추와 마늘, 파, 생강, 젓갈이 어우러진 걸쭉하고 풍성한 혼합 양념이 탄생하자, 선조들은 이를 채소에 효과적으로 버무리고 보존할 새로운 방식을 고안해 냈습니다. 그것이 바로 채소(배추)의 잎과 잎 사이에 양념을 켜켜이 채워 넣는 포저법[泡菹法/包菹法, Stuffing method]입니다.
문헌을 살펴보면, 19세기 말의 조리서인 『시의전서[是議全書, Sieuijeonseo]』 등에서 배추나 동아[冬瓜, Winter melon]에 칼집을 내어 고기나 해산물, 갖은 양념을 소로 채워 넣는 형태의 화려한 섞박지[Seokbakji, Mixed kimchi]와 통김치 제법이 폭넓게 등장합니다.[서지학연구, 2018]
단순히 물에 가라앉히던 1차원적 발효(일차침채)에서 벗어나, 양념을 채우고 다시 발효시키는 이차침채[二次沈菜, Secondary fermentation]의 고도화된 기술로 진입한 것입니다.[동북아역사논총]
| 구분 | 담저법[沈菹法] | 포저법[泡菹法/包菹法] |
|---|---|---|
| 핵심 원리 | 소금물이나 장에 채소를 완전히 잠기게 담금 | 배추 잎 사이나 무의 칼집 속에 복합 양념을 채워 넣음 |
| 주요 재료 | 무, 오이, 가지, 소금, 간장, 천초 | 결구배추, 고춧가루, 마늘, 생강, 각종 젓갈 |
| 시대적 배경 | 조선 전기 (고추 유입 이전) | 18세기 이후 (고추 및 젓갈 사용의 보편화) |
| 현대적 형태 | 동치미, 짠지, 나박김치, 장아찌 | 통배추김치, 보쌈김치, 오이소박이 |
팁
요즘 고깃집에서 반찬으로 나오는 맑은 명이나물 절임이나 쌈무는 '담저법'의 후손이고, 속이 꽉 찬 배추김치나 아삭한 오이소박이는 '포저법'의 자랑스러운 후손입니다. 식탁 위에 놓인 반찬을 보며 이 두 가지 조리법의 뿌리를 구분해 보면 식사 시간이 훨씬 더 즐거워집니다.
자주 묻는 질문
Q1: 포저법은 배추로 담근 김치에만 쓰이는 말인가요?
배추뿐만 아니라 오이소박이나 가지김치처럼 채소에 칼집을 내고 그 틈에 소(양념)를 채워 넣는 모든 고도화된 방식을 포괄하는 개념입니다. 양념이 씻겨 내려가지 않고 채소 내부에 깊이 배어들게 하는 훌륭한 과학적 기법입니다.
Q2: 왜 하필 18세기에 이런 방식이 폭발적으로 발달했나요?
농업 기술의 발달로 다양한 채소 재배가 가능해졌고, 상품 화폐 경제가 발달하면서 전국 단위로 소금과 새우젓, 멸치젓 등 해산물의 내륙 유통망이 크게 확장되었기 때문입니다.[조선시대 젓갈 활용과 김치 조리법의 변천, 2024]
Q3: 포저법이 유행하면서 기존의 담저법(물김치류)은 사라졌나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매운 양념 김치(포저법)와 시원하고 맑은 물김치류(담저법)는 서로의 맛을 보완하며 함께 발전했습니다. 고구마를 먹을 때 동치미를 찾듯, 두 조리법은 완벽한 조화를 이루며 식탁의 풍요를 이끌었습니다.
마무리
소금물에 둥둥 떠 있던 소박한 채소가 붉은 생명력을 품은 화려한 보석으로 재탄생하기까지, 18세기 조선의 식탁 위에서는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하고 위대한 미식의 혁명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문헌 속 사실들을 짚어보겠습니다.
담저법[沈菹法, Submerging method] [더 알아보기]
핵심 정리
- 담저법[沈菹法]: 조선 전기까지 주를 이루었던 방식. 채소를 소금이나 장에 단순히 가라앉히는 저장법.
- 젓갈과 고추의 융합: 18세기 『수문사설』 등의 기록을 통해 고추의 항균력과 젓갈의 감칠맛이 폭발적으로 결합.
- 포저법[泡菹法]의 완성: 배추 잎 사이와 채소의 틈에 복합 양념을 채워 넣는 고도화된 발효 기술로, 오늘날 통김치의 기틀을 마련.
오늘 저녁, 잘 익은 통배추김치의 밑동을 자르고 잎을 길게 찢어 따뜻한 밥 위에 올려보시길 바랍니다. 겹겹이 채워진 그 붉은 양념 속에는 수백 년 전 선조들이 빚어낸 맛의 혁명이 고스란히 숨 쉬고 있습니다.
참고 자료
- 동북아역사논총 (조선 후기 양념김치의 등장과 확산, 박채린)
- 서지학연구 (김치류 서지의 계통에 관한 연구, 2018)
- 조선시대 젓갈 활용과 김치 조리법의 변천 (調理書 분석을 중심으로, 2024)
- 산가요록 (전순의)
- 수문사설
- 시의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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