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치의 붉은 배신, 18세기 전의 조상은 '가짜'를 먹었나?
K-Food 김치 뿌리 03 : 지금의 붉은색 김치는 언제부터였을까?
'김치' 하면 반사적으로 붉은색과 매콤한 고추 맛이 떠오릅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우리가 아는 붉은 김치의 역사는 생각보다 그리 길지 않습니다. 고추가 한반도에 들어온 것은 16세기 말 임진왜란 이후이며, 김치에 본격적으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18세기 무렵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고추가 없던 18세기 이전의 긴 시간 동안 우리 조상들의 식탁은 맵지 않고 심심하기만 했을까요? 옛 문헌들을 살펴보니 선조들은 주어진 환경 속에서 고추를 대신할 놀랍도록 다채로운 향신료를 활용하여 알싸한 맛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천초와 산초, 한반도의 원초적 매운맛
고추가 등장하기 전, 한반도의 매운맛을 책임졌던 일등 공신은 바로 천초와 산초였습니다.
천초는 초피나무의 열매 껍질을 말하며, 특유의 톡 쏘는 아린 맛이 강하며, 산초는 산초나무의 열매로 은은하면서도 상쾌한 향이 특징입니다. 문헌을 보면 신라와 고려시대로 접어들면서 나박김치와 동치미가 발달했는데, 신라와 고려시대에는 양념으로 가장 널리 쓰인 것이 바로 천초와 생강, 귤껍질 등이었습니다.
17세기 후반 조리서 <요록>의 기록에 의하면, 고추 대신 소금과 천초를 적극적으로 사용하여 맛을 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고추의 직선적인 매운맛과는 달리, 입안이 얼얼해지는 입체적인 매운맛을 즐겼던 것입니다.
고추 이전의 3대 매운맛의 대용품으로는 천초의 알싸함, 후추의 매콤함, 생강의 열기가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귀족들의 매운맛, 후추
산초와 천초가 산과 들에서 비교적 쉽게 구할 수 있는 토속 향신료였다면, 후추는 실크로드를 거쳐 수입되는 매우 값비싼 향신료였습니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귀족층이나 궁중에서는 김치나 절임류에 후추를 넣어 고급스러운 매운맛과 풍미를 더했습니다.
1670년경 쓰여진 아시아 최초의 여성 저술 조리서 <음식디미방> 기록에서도 고춧가루 대신 천초나 후추를 활용하여 김치의 맛을 낸 흔적이 명확히 나타납니다.
당시 후추는 금값과 맞먹을 정도로 귀했기 때문에 후추가 들어간 김치를 상에 올리는 것은 가문의 재력과 권위를 과시하는 상징이기도 했습니다.
마늘과 생강 그리고 귤껍질의 조화
매운맛을 내는 또 다른 핵심 재료는 생강과 마늘이었습니다.
15세기 서거정 등이 편찬한 <동문선>의 <산촌잡영>이라는 시를 통해 김치 재료로 배추와 무뿐만 아니라 자소, 생강, 마늘 등을 널리 이용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생강의 알싸한 맛과 마늘의 독특한 향미는 채소의 풋내를 잡고 발효를 돕는 방부제 역할까지 했습니다.
오늘날 남부 지방에서 추어탕에 넣어 먹는 '젠피'라고 불리는 '초피'가 바로 과거 우리 조상들이 김치에 넣었던 '천초'입니다. 그 강렬하고 톡 쏘는 향이 과거 김치의 주된 매운맛이었다고 상상하면, 선조들의 밥상 풍경이 훨씬 더 역동적으로 다가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1: 고추는 정확히 언제부터 김치에 들어가기 시작했나요?
16세기 말 유입된 고추는 18세기 중엽인 <증보산림경제> 무렵에 이르러서야 김치의 주요 양념으로 본격적인 기록이 등장합니다. 18세기 중엽 전까지는 산초나 천초가 주류였습니다.
Q2: 고추가 없었다면 옛날 김치의 색깔은 전부 하얀색이었나요?
주로 맑은 국물의 백김치나 간장에 담근 장아찌 형태였지만, 붉고 고운 색감을 내고 싶을 때는 맨드라미꽃을 섞어 넣어 시각적인 아름다움을 더하기도 했습니다.
Q3: 고추의 캡사이신이 없어도 김치의 발효가 잘 일어났나요?
네, 충분합니다. 소금의 염장 효과와 생강, 마늘, 천초 등이 지닌 강력한 항균 작용 덕분에 유산균 발효가 안정적인 최적의 환경이 구축되었습니다.
김치는 고추가 들어오기 훨씬 이전부터 척박한 자연을 활용한 조상들의 지혜로 이미 완성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천초와 산초는 고추 유입 전, 오랫동안 알싸한 매운맛으로 한반도의 밥상을 책임지며 가장 대중적이었습니다.
외래 수입 향신료인 후추는 양반가와 궁중에서 고급스러운 맛과 권위를 내기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생강과 마늘의 사용은 15세기 문헌에도 명시될 만큼 김치의 풍미를 살리고 건강한 발효를 돕는 핵심 재료였습니다.
오늘날의 붉고 매운 김치도 훌륭하지만, 맑은 국물에 산초와 생강 향이 은은하게 퍼지는 수백 년 전의 하얀 김치를 상상해 보는 것도 큰 즐거움입니다.
우리 김치 음식의 뿌리는 이토록 깊고 다채롭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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