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치 석박지가 뭐야? '섞고 박는' 행위는 감칠맛 최고
K-Food 김치 뿌리 32: 찬바람이 불 때면 '석박지', 감침맛 그 이름에 담긴 뜻과 유래
창문 틈으로 아직 찬바람이 스며드는 초봄이 와도, 어김없이 생각나는 반찬이 하나 있습니다. 따끈하고 뽀얀 설렁탕이나 국밥에 곁들여 먹을 때 그 진가를 발휘하는 큼지막한 김치, 바로 석박지또는 섞박지 입니다. 숭덩숭덩 무심하게 썰어 넣은 무와 배추가 붉은 양념과 함께 이리저리 뒤엉켜 아작아작 경쾌한 식감을 뽐내는 석박지는, 그저 평범한 식탁 위의 조연이 아니라 오랜 세월 우리 선조들의 지혜가 농축된 한국 김치 역사의 찬란한 보석입니다. 이 보석의 정체를 옛 고문과 보고서들을 탐험하듯 추적해 봅니다.
국밥집의 숨은 주인공, 도대체 넌 누구니?
다들 뽀얗고 뜨끈한 설렁탕이나 곰탕 드실 때, 깍두기도 아니고 배추김치도 아닌 큼지막하고 넓적하게 썰린 붉은 김치를 드셔보신 적 있으신가요? 아작아작 씹히는 그 시원하고 매콤달콤한 맛에 밥 한 공기를 뚝딱 비우게 됩니다. 벌써 6개월째 저도 집 근처 단골 국밥집에 가면 자리에 앉자마자 무조건 이 김치부터 접시에 듬뿍 담아놓고 식사를 시작합니다.
그런데 가위로 숭덩숭덩 자르다 문득 궁금해졌습니다. 깍두기처럼 예쁜 네모도 아니고, 왜 이 녀석은 모양이 이리저리 제멋대로일까? 놀랍게도 이 친숙하고 든든한 반찬의 진짜 이름은 석박지또는 섞박지 입니다. 세상에 치이고 부대끼며 살아가는 우리네 일상처럼, 배추와 무 등 다양한 채소를 투박하게 섞어서 항아리 구석구석 빈틈없이 박아 넣는다는 아주 직관적이고 역동적인 뜻을 품은 재미있는 이름입니다.
하얀 채소 절임에서 붉은 마법으로의 진화
제가 찾아본 서울대학교 한국경제와 K학술확산 연구센터의 자료에, 아주 먼 옛날 우리의 조상들은 채소를 그저 소금이나 맑은 장에 외롭게 절여 먹었습니다. 그러다 15~16세기 즈음, 국물을 줄이고 채소에 다양한 양념을 버무리기 시작하면서 진정한 발효의 마법이 시작됩니다.
특히, 세계김치연구소의 기록을 살펴보면, 이 시기부터 밭에서 나는 식물성 채소에 바다에서 나는 동물성 젓갈을 섞기 시작한 것이 한국 김치만의 독보적인 정체성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이후 17세기에 바다를 건너온 신대륙 작물인 고추의 붉은 매운맛이 젓갈의 짭짤한 감칠맛과 절묘하게 만나면서, 마침내 우리가 그토록 열광하는 새빨간 섞박지가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배추김치의 위대한 조상님
외국인 친구들에게 한국 음식을 소개할 때 흔히 통째로 버무린 붉은 배추김치를 가장 먼저 떠올리곤 합니다. 하지만 속이 하얗게 꽉 찬 결구배추가 한반도에 널리 보급되어 지금의 통배추김치가 만들어진 것은 19세기에서 20세기 무렵의 일입니다. 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문화사 기록을 보더라도 통배추김치는 생각보다 그리 오래된 근대의 산물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 이전의 수백 년 동안 우리 선조들은 무엇을 먹으며 겨울을 버텼을까요? 바로 무를 중심으로 각종 채소와 해산물을 풍성하게 버무려 먹던 섞박지가 겨울 밥상을 든든하게 지켜주었습니다. 무려 200년이상 갈고닦아온 섞박지의 완벽한 양념 배합과 발효 지혜가 새로운 식재료인 통배추에 그대로 이식된 셈입니다. 결국 섞박지는 현대 김치 문화의 뼈대를 튼튼하게 세워준 위대한 조상님입니다.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가는 역사 지식
호화로운 양반가의 미식 <규합총서, 1809>: 빙허각 이씨라는 여성 실학자가 엮은 가정 백과사전입니다. 당시 양반가에서 즐기던 무려 8가지의 다양한 김치가 기록되어 있는데, 특히, 섞박지에는 낙지, 생전복, 소라, 맑은 조기젓 국물 등을 듬뿍 넣어 마치 겨울의 보석처럼 화려하게 즐겼다고 합니다.
동전이 김치 독에 들어간 사연: 옛 선조들은 김치가 익어가는 긴 겨울 동안 채소의 푸른 빛깔을 생생하게 유지하려고, 항아리 속에 구리를 닦은 수세미나 구리녹이 슨 동전 1~2개를 함께 넣었다고 합니다. 시각적인 아름다움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치열한 미학입니다.
서민들의 지혜 <소문사설, 1720년경>: 어의 이시필이 쓴 실용서에는 젓갈이 귀할 때 시장에서 버려지는 생선 비늘을 주워다 푹 끓여 맑은 젓국을 내는 구체적인 방법이 적혀 있습니다. 가난 속에서도 깊은 맛을 내려 했던 백성들의 억척스러운 삶이 엿보입니다.
제대로 알고 즐기기
Q. 깍두기와 석박지는 도대체 뭐가 다른가요?
깍두기는 오직 '무' 하나만을 정육면체로 깍둑썰기해서 담그는 김치입니다. 반면 석박지는 무뿐만 아니라 배추, 얼갈이, 해산물 등 여러 가지 재료를 큼지막하게 '섞어' 담그는 것이 가장 큰 차이점입니다.
Q. 고추가 들어오기 전, 옛날 사람들은 매운맛을 어떻게 냈나요?
조선시대 실학자 이수광의 <지봉유설> 등을 보면 고추는 임진왜란 무렵 전래되었습니다. 그 이전에는 혀가 얼얼해지는 천초나 후추, 마늘을 이용해 매운맛을 냈습니다. 특히 산초는 생선의 비린내를 잡고 김치의 부패를 막아주는 일등 공신이었습니다.
생활 꿀팁
집에서 국밥집 석박지 맛 내기
식당 특유의 달착지근하고 시원한 석박지 맛의 비밀은 바로 탄산과 단맛의 조화에 있습니다. 무를 절일 때 사이다를 살짝 섞거나, 양념에 요구르트를 하나 넣으면 유산균 발효가 폭발적으로 촉진되어 톡 쏘는 청량감을 낼 수 있습니다. 실제로 해보니 숙성도 빠르고 감칠맛이 살아있었습니다.
함께 나눈 섞박지의 매력, 잊지 않게 딱 세 가지만 정리해 보겠습니다.
- 석박지는 여러 재료를 섞어서 항아리에 박아 넣었다는 뜻의 아주 직관적이고 역동적인 김치입니다.
- 식물성 채소에 동물성 젓갈을 결합하여 한국 김치만의 독보적인 정체성을 완성한 15~16세기 발효 과학의 결정체입니다.
- 현대의 통배추김치가 탄생하기 전까지 수백 년간 우리 선조들의 겨울을 지켜준 든든한 뿌리이자 밑거름이었습니다.
다음 번에는 고구마와 김치, 우유와 김치: 역사적으로 증명된 영양 조합을 알아보겠습니다.
알면 알수록 재미있는 K-Food의 숨은 역사 중 듣고 싶은 주제가 있다면 언제든 편하게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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