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0년 전 김치 '문학'을 썼고, 오늘의 세계는 '문화'라 읽는다
K-Food 김치 뿌리 02: '김치'의 다른 이름 "'무'장아찌"
매일 밥상에 오르는 시원한 깍두기나 동치미를 먹을 때면, 이 아삭한 식감이 언제부터 우리 민족의 입맛을 사로잡았는지 문득 궁금해질 때가 있습니다. 음식의 역사를 좇아 거슬러 올라가다 보니, 놀랍게도 800여 년 전 고려시대 문호의 시 속에서 오늘날과 다름없는 무김치의 생생한 흔적을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평범한 식탁 위의 반찬이 당대 최고 지식인의 문학 작품으로 남았다는 사실은, 김치가 단순한 음식을 넘어 우리 삶을 지탱해 온 든든한 뿌리였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800년 전의 텃밭 예찬, <가포육영>
고려시대 대문호 이규보가 1241년에 펴낸 <동국이상국집>을 펼쳐보면 무척 흥미롭고 정겨운 시 한 편 등장합니다.
바로 자신의 텃밭에 심은 오이, 가지, 파, 순무, 아욱, 박 등 여섯 가지 채소를 예찬한 작품이 <가포육영>입니다.
문헌을 살펴보면, 이 시에 등장하는 순무에 관한 구절은 한반도 김치 역사상 가장 오래되고 구체적인 기록으로 중요한 가치가 있습니다.
이규보의 시에 기록된 무절임은 두 가지 형태로 나뉩니다.
시구에 담긴 생생한 묘사
시의 원문을 보면 선조들의 밥상 풍경이 눈앞에 그려집니다.
이규보는 시 원문을 통해 "장에 담근 장아찌 여름철에 먹기 좋고, 소금에 절인 순무 겨울 내내 반찬 되네."라고 표현하면서 생생한 식감 묘사를 "뿌리는 땅속에서 자꾸만 커져, 서리 맞은 것 칼로 베어 먹으니 배와 같은 맛이지"라며 늦가을 서리를 맞고 단맛이 든 무의 맛을 극찬하고 있습니다.
무를 과일인 '배'에 비유한 대목에서 당시 사람들이 채소를 얼마나 각별하게 여겼는지 알 수 있습니다.
여름의 '득장'과 겨울의 '지염'
자료에서 가장 눈에 띄었던 점은 계절에 따라 채소의 저장 방식을 명확히 다르게 적용했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냉장 시설이 없던 시대에 기후 환경을 이겨내기 위한 훌륭한 발효 과학이었습니다.
이규보 시에 나타난 두 가지 염장법 비교
먼저 여름철에는 '득장'이라는 명칭을 사용했는데, 이는 무더운 여름, 가만히 있어도 음식이 쉽게 상하는 것을 막기 위해 짠 장 즉, 간장과 된장에 끼워둠으로 강한 염분 속에 보관함으로써 부패와 미생물을 원천 차단하는 수단으로, 현재의 장아찌 원형의 탄생입니다.
또한, 겨울철에는 채소가 나지 않는 굶주림의 절박함에는 '지염'이라는 이름으로 긴 겨울을 나기 위해 늦가을에 소금물에 절여 추운 기간을 견디게 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얼음을 동동 띄워 시원하게 먹는 동치미의 시초가 되었습니다.
'득장'과 '지염'의 직계 후손 알고 먹기
고깃집이나 식당에 가면 흔히 나오는 짭조름한 양파 장아찌나 쌈무, 그리고 겨울철 고구마와 함께 먹는 동치미 국물을 저는 아주 좋아하는 반찬인데 이것들이 바로 800년 전 '득장'과 '지염'의 직계 후손들입니다.
이 오랜 지혜의 산물임을 알고 맛보면, 그 아삭함 속에 깃든 역사의 깊이가 저의 입맛에 훨씬 진하게 다가옵니다.
배추 이전, 식탁의 진정한 지배자 '무'
우리는 흔히 '김치'라고 하면 붉은 통배추김치를 떠올립니다. 하지만 이규보의 시를 포함해서 조선시대 초기 문헌들까지 깊이 들여다보면, 당시 식탁의 진정한 지배자는 배추가 아닌 '무'와 '순무'였습니다.
당시 한반도에서 재배되던 배추는 지금처럼 속이 꽉 찬 '결구배추'가 아니라 상추처럼 잎이 벌어진 비결구종이어서, 잎이 얇고 저장성이 떨어졌습니다. 반면, 단단한 뿌리채소인 무는 겨울철에 오래 보관하며 발효시키기에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이규보가 '배추' 대신 '순무'를 시의 주역으로 삼은 것은 단순한 개인적 취향이 아니라, 당대 농업 및 식문화의 현실이 짙게 반영된 결과입니다.
이규보가 예찬한 무와 현재의 무 비교
이규보가 먹은 것은 지금의 무와 똑같은 채소가 아니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시에 기록된 한자는 '청'으로, 이는 오늘날 주로 강화도 등지에서 재배되는 '순무'를 가리킵니다. 일반 무보다 알이 작고 단단하며 톡 쏘는 알싸한 맛과 단맛이 특징입니다.
그때의 무김치는 붉거나 맵지 않았습니다.
고추가 한반도에 유입된 것은 16세기 말, 임진왜란 이후의 일입니다. 따라서 13세기 고려시대 이규보가 먹었던 무김치는 고춧가루가 전혀 들어가지 않은 맑은 소금물에 절인 하얀 동치미나 짠지 형태였습니다.
국가 의례 문서가 아닌 개인 문집의 기록이 중요한 이유
국가 공식 기록에 등장하는 의례용 절임 채소인 '저'는 제사상에 오르는 형식적인 음식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반면, 이규보의 개인 문집 속 기록은 당시 백성들과 선비들이 일상생활 속에서 실제로 텃밭을 일구고 반찬을 만들어 먹었던 생생한 '생활사'를 증명해주므로 식문화 연구에서 매우 높은 가치를 지닙니다.
옛 문학 속에 잠들어 있던 이규보의 시구 하나가, 오늘날 우리가 무심코 씹어 먹는 무김치 한 조각에 800년이라는 거대한 생명력을 불어넣어 줍니다.
긴 겨울을 나기 위해 소금에 무를 묻었던 선조들의 절박함. 그리고 늦가을 서리 맞은 무의 단맛을 과일에 비유하며 풍류를 잃지 않았던 낙천적인 태도를 엿볼 수 있었습니다.
냉장고 문을 열어 하얀 동치미나 무김치를 꺼내실 때, "서리 맞은 무를 베어 먹으니 배와 같은 맛이지"라며 미소 지었을 800년 전 한 선비의 여유있는 모습을 상상하며 동치미 한 그릇의 가치를 저와 함께 여러분도 한 번쯤 떠올려 보시길 권해드립니다. 평범한 식탁 위의 반찬이 오늘따라 유독 특별하고 달게 느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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