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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 화려한 수라상 뒤로 망국의 압박을 견디고 오늘의 한국을 만든 식탁 위 생존 법칙

관리자
2026년 3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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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Food 김치 뿌리 10: 고종 황제가 사랑한 배동치미와 냉면의 인문학

망국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우던 구한말, 외세의 압박 속에서 밤잠을 이루지 못했던 한 군주가 있었습니다. 조선의 제26대 왕이자 대한제국의 제1대 황제였던 고종입니다. 국가 제사에 오르는 화려한 제찬이나 값비싼 해산물이 듬뿍 들어간 궁중 김치도 그의 타는 속을 달래주지는 못했습니다. 역사의 기록을 살펴보면,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던 고종 황제에게 가장 큰 위로가 되어준 음식은 다름 아닌 시원하고 달콤한 '배동치미'와 이를 활용한 '냉면'이었습니다. 한 그릇의 차가운 국수 속에 담긴 군주의 고독과 식문화의 역사를 탐구해 보았습니다.


화려한 궁중 김치와 달랐던 황제의 야참

조선 왕실의 일상적인 '김치'인 '젓국지'나 '장김치'는 10년 이상 묵힌 귀한 궁중 간장을 쓰거나 전복, 굴, 낙지 등 값비싼 식재료가 총동원되는 화려한 음식이었습니다.
하지만 고종이 불면증에 시달리며 야참으로 찾았던 김치는 이와는 결이 달랐습니다.

고종은 겨울에는 '설렁탕'과 '온면'을, 여름에는 시원한 냉면을 야참으로 즐겼습니다. 특히, 냉면의 육수로 쓰인 것은 고기 육수가 아니라, '배'를 듬뿍 넣어 아주 달고 시원하게 담근 배동치미였습니다.

자극적인 맛을 피하고 담백함을 추구하는 수라상의 기본 원칙을 따르면서도, 답답하고 꽉 막힌 황제의 속을 뻥 뚫어주기 위해 고안된 맞춤형 발효 국물이었던 셈입니다.

고종 황제의 배동치미 냉면 특징

고종의 냉면은 고기 육수 대신 단맛이 강한 배동치미 국물을 사용했으며, 면 위에는 편육을 십자 형태로 올리고 잣을 풍성하게 덮어 장식했다. 특히 배는 칼을 대지 않고 숟가락으로 초승달 모양으로 떠내어 국물과의 조화를 꾀했습니다.


후궁 삼축당이 전하는 숟가락과 초승달의 미학

고종 황제가 즐겼던 이 특별한 배동치미 냉면의 생생한 묘사는, 고종의 냉면 취향은 후궁 삼축당 김씨의 구술 기록을 통해 구체적으로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삼축당의 회고에 따르면, 꾸미와 고명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꾸미'는 꾸미다에서 '고명'은 음식의 맛과 멋을 더하기 위해 얹은 재료를 의미하는 옛말입니다.

즉, 고종의 냉면은 편육과 배, 잣을 면 위에 가득 덮어 맛과 멋을 더한 장식하는 것이 특징이었습니다. 주목할 만한 대목은 배를 깎을 때 일반적인 방식처럼 칼로 반듯하게 써는 것이 아니라, 숟가락으로 한 입 크기씩 떠내어 초승달 모양으로 만들어 소복하게 덮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하면 배의 조직이 으깨지면서 단물이 동치미 국물과 더욱 잘 어우러져, 씹는 식감과 국물의 담백함이 극대화되는 미식의 원리가 숨어 있었습니다.


궁궐 밖에서 배달시킨 '냉면 사리'

자료를 분석하면서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산해진미를 다룰 수 있는 궁중의 수라간을 두고도 고종이 냉면 사리만큼은 궁궐 밖에서 사 오게 했다는 기록입니다.

19세기 초 한양 도성에는 이미 냉면 전문점들이 성행하며 백성들의 인기 외식 메뉴로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순조 임금 시절에도 당직을 서는 군사들을 불러 궐 밖에서 냉면을 사 오게 하여 함께 먹었다는 일화가 전해지는데, 고종 역시 궐 밖의 면을 즐겼습니다.

이는 황제가 수라간을 두고도 궐 밖에서 냉면 사리를 공수하게 한 것은, 당대 성행하던 시장의 식문화를 수용함과 동시에 한 그릇의 국수로 황제의 무게를 잠시나마 내려놓고자 했던 인문학적 고뇌가 투영된 지점입니다.

조선 왕실 김치의 두 얼굴: 풍요와 치유

성격의 차이
조선 왕실의 일반적인 김치가 권위와 풍요를 상징하며 해산물이 듬뿍 들어간 젓국지나 섞박지 형태였다면, 고종의 배동치미는 깊은 밤 불면과 스트레스를 달래기 위한 치유의 음식이라는 성격이 강했습니다.

재료의 구성
보편적인 왕실 김치는 해산물, 잣, 밤, 표고버섯 등 당시 구할 수 있는 가장 진귀한 식재료를 총동원하여 화려하게 담갔습니다. 반면, 고종의 야참용 동치미는 무와 초승달 모양으로 썬 배, 소금, 잣만을 주재료로 사용하여 단순함의 미학을 보여주었습니다.

맛의 특징
왕실의 김치가 감칠맛과 짠맛이 어우러진 화려하고 복합적인 풍미를 자랑했다면, 배동치미는 자극적이지 않고 달콤하며 가슴 속까지 뻥 뚫어주는 시원한 청량감이 특징입니다.

겨울철 냉면 전문점에 가면 살얼음이 낀 동치미 국물을 섞어 내어주는 평양냉면을 맛볼 수 있습니다. 슴슴한 국물을 들이켤 때, 나라를 잃어가는 슬픔 속에서 이 시원한 국물 한 모금으로 숨을 돌려야 했던 고종 황제의 마음을 상상해 본다면 그 맛의 깊이가 훨씬 무겁게 다가올 것입니다.


다른 조선 임금들도 냉면이나 동치미를 즐겨 먹었습니다
조선 후기 임금들에게 냉면은 친숙한 별미였습니다. 23대 순조를 비롯해 철종 역시 냉면을 무척 좋아하여 칠월 칠석에 냉면을 먹고 체했다는 『일성록』의 기록이 있을 정도입니다.

고종 황제는 밤에 굳이 차가운 배동치미 냉면을 먹었던 이유가 있습니다.
구한말의 혼란스러운 정치 상황 속에서 고종은 극심한 스트레스와 불면증에 시달렸습니다. 한의학적으로 가슴에 찬 화를 내리고 속을 편안하게 돕는 천연 소화제 역할을 동치미 국물과 배가 해주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궁중에는 얼음이 있었습니다.
조선은 '동빙고'와 '서빙고'라는 국가 주도의 얼음 저장 시설을 갖추고 있었으며, 왕실에서는 여름철에도 겨울에 저장해 둔 얼음을 '동치미'나 '식혜' 등에 띄워 차갑게 즐길 수 있었습니다.


아무리 진귀하고 훌륭한 발효 과학으로 무장한 궁중 김치라 할지라도, 나라의 운명이 흔들리는 격동기에는 황제의 타들어 가는 속을 온전히 위로할 수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결론적으로 고종의 배동치미 냉면은 불면과 화병을 다스리는 치유의 산물이었으며, 숟가락으로 떠낸 배의 형태와 궐 밖 냉면의 도입은 조선 왕실 미식 문화의 독창성과 개방성을 증명하는 중요한 사료입니다.

우리가 고깃집이나 식당에서 무심코 들이켜는 시원한 동치미 국물 한 그릇 속에는 이렇듯 수백 년 전 뜬눈으로 밤을 지새워야 했던 한 군주의 쓸쓸한 숨결이 녹아 있습니다. 오늘 저녁, 시원한 동치미를 마주하게 된다면 그 청량감 속에 담긴 역사의 묵직한 서사를 한 번쯤 곱씹어 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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