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치

궁중 김치의 젓국지를 아는가? 사극 드라마는 알려주지 않는 백성과 다른 조선 왕실의 발효 내공

관리자
2026년 3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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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Food 김치 뿌리 09 : 조선 왕실의 김치 '젓국지', 백성과 무엇이 달랐을까?

궁궐을 배경으로 한 사극 드라마를 보면 '임금님의 수라상'에는 언제나 산해진미가 가득합니다. 그렇다면 조선을 통치했던 왕과 왕실 가족들은 우리가 매일 먹는 반찬인 김치도 일반 백성들과는 다르게 담가 먹었을까요? 조선왕조의 방대한 기록 유산인 **<원행을묘정리의궤>**를 통해 당시 왕실의 식문화를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고, 그중에서도 궁중의 일상식과 의례식이 아주 상세히 적힌 부분을 통해 우리는 수백 년 전 왕실의 은밀한 김칫독 안를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정조 임금의 효심이 깃든 의궤 기록을 중심으로, 맵고 짠 서민들의 김치와는 확연히 달랐던 왕실 김치 젓국지의 품격과 식문화를 따라가 보았습니다.


정조의 효심이 담긴 식단표, 『원행을묘정리의궤』

조선 왕실의 음식 문화를 파악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하고 유일무이한 기록 중 하나는 1795년 정조 19년에 편찬된 『원행을묘정리의궤』입니다.

이 책은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맞아 화성 수원의 현륭원에 참배를 다녀온 8일간의 모든 행사를 기록한 국가 공식 문서입니다. 특히 <권4 찬품편>에는 혜경궁 홍씨와 정조, 그리고 수천 명의 수행원이 새벽부터 밤까지 먹은 매끼 식단인 죽수라, 조수라, 석수라 등과 음식에 들어간 재료의 분량이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른 의궤들이 주로 연회용 음식만을 다룬 것과 달리, 이 기록은 조선시대 궁중의 일상식 반찬으로 어떤 김치들이 어떻게 상에 올랐는지를 명확히 보여주는 보물 같은 사료입니다.

조선 왕실 수라상에 오르던 3대 김치

젓국지: 맑은 조기젓이나 새우젓 국물로 간을 맞춘 품격 있는 배추김치.
송송이: 무를 작고 네모나게 썰어 담근 궁중식 깍두기.
국물김치 동치미, 나박김치: 시원하게 국물을 들이켤 수 있는 맑은 침채.


궁중의 배추김치 '젓국지', 그리고 섞박지

젓국지는 이름 그대로 젓갈 국물을 사용해 담근 통배추 김치입니다. 일반 백성이나 남부 지방에서는 멸치젓이나 갈치속젓처럼 색이 진하고 비린내가 강한 젓갈을 고춧가루와 함께 듬뿍 버무려 자극적인 맛을 냈습니다.

반면, 궁중에서는 비린내가 적은 조기젓이나 황석어젓 국물을 끓여 불순물을 제거한 뒤, 맑은 젓국만을 김치에 부어 담백하고 정갈한 감칠맛을 구현했습니다.

여기에 더해 젓국지나 여러 재료를 함께 버무린 '섞박지'를 담글 때는 그야말로 산해진미가 총동원되었습니다. 질 좋은 배추와 무를 바탕으로 배, 잣, 밤, 대추, 표고버섯, 석이버섯, 낙지, 전복, 굴 등 진귀한 고급 식재료가 아낌없이 들어갔습니다.

매운 고춧가루의 사용은 최소화하여 김치 색이 진한 빨간색이 아닌 '옅은 붉은빛'을 띠었으며, 짜지도 싱겁지도 않은 완벽한 중용의 맛, 즉 은은하고 정갈한 감칠맛의 극치를 추구했습니다.


10년 묵힌 씨간장의 마법, 궁중 장김치

고춧가루와 젓갈이 들어간 김치 외에도 조선 왕실이 특별히 사랑했던 또 하나의 명품 김치가 있으니, 바로 간장으로 담근 '장김치'입니다.

궁중 음식 기록에 따르면 장김치는 젓갈이나 고춧가루, 소금을 전혀 쓰지 않고 오로지 오랜 세월 묵힌 궁중의 귀한 간장으로만 배추와 무를 절이고 간을 맞추었습니다. 궁중에서는 10년 이상 정성껏 묵힌 '씨간장'을 사용했기에, 발효가 진행되면서 짠맛은 줄어들고 조청처럼 깊은 단맛과 짙은 감칠맛이 우러나왔습니다.

조선의 마지막 황제인 순종은 겨울철 장김치를 가장 먼저 맛보았을 정도로 이를 아꼈으며, 이는 고춧가루 없이 씨간장의 단맛으로 빚어낸 왕실의 명품 김치였다.

고급 한정식집이나 종갓집에서 코스 요리를 시키면 고춧가루가 거의 들어가지 않아 맑으면서도 잣과 배가 동동 띄워진 '나박김치'나 '백김치'가 식전 음식으로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극적이지 않으면서도 깊은 감칠맛을 내는 이 정갈한 국물이 바로 조선시대 왕실 수라상에 오르던 '궁중 김치'의 철학을 가장 잘 계승한 맛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임금님이 드시는 김치를 만드는 배추는 특별한 곳에서 키웠나요?

그렇습니다. 1900년대 초 기록을 보면 궁중에서 쓰는 배추는 한양 도성 내의 마장동, 왕십리, 연건동 일대에 왕실 전용 텃밭인 '채마전'을 지정해 놓고 전문적으로 재배했습니다. 이곳의 배추는 토질이 좋아 속이 꽉 차고 힘줄이 적어 무척 연하고 달았다고 합니다.

Q: 수라상에 오르는 깍두기는 왜 '송송이'라고 불렀나요?

투박하고 큼직하게 써는 일반 깍두기와 달리, 왕실 어른들이 드시기 편하도록 무를 아주 작고 네모반듯하게 '송송' 썰었다고 해서 궁중 용어로 '송송이'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Q: 『원행을묘정리의궤』에는 김치 만드는 조리법도 기록되어 있나요?

아쉽게도 의궤에는 식단에 오른 음식명과 거기에 사용된 식재료의 분량까지만 꼼꼼하게 기록되어 있고, 구체적으로 어떻게 버무리는지에 대한 조리법 자체는 적혀 있지 않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아는 궁중 김치의 형태는 당시의 식재료 목록과 다른 조리서들을 바탕으로 궁중음식 연구가들이 과학적으로 유추하고 재현해 낸 것입니다.


가장 좋은 땅에서 길러낸 여린 배추, 남해 바다에서 맑게 걸러낸 조기젓, 10년을 기다린 씨간장. 조선 왕실의 김칫독은 단순히 채소를 보관하는 곳이 아니라, 온 나라의 훌륭한 산물이 모여 가장 우아한 발효를 이뤄내는 미식의 집결지였습니다.

원행을묘정리의궤: 정조 임금이 화성에 행차할 때의 기록으로, 혜경궁 홍씨를 위해 정갈하고 부드럽게 조리된 궁중 일상식의 비밀이 담겨 있습니다.
품격의 젓국지: 비린 젓갈을 통째로 넣는 대신 맑게 끓인 조기젓 국물과 고급 견과류, 해산물을 듬뿍 넣어 맵지 않고 은은한 감칠맛을 완성했습니다.
10년의 맛, 장김치: 고춧가루 없이 왕실에서 오래 묵힌 진한 간장으로 담가, 짠맛을 넘어선 조청 같은 단맛으로 왕들의 입맛을 사로잡았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정성스레 끓여 낸 맑은 젓국으로 김치를 담그거나 손님상에 잣을 띄운 맑은 나박김치를 올릴 때, 우리 손끝에는 이미 수백 년 전 조선 왕실이 추구했던 가장 정갈하고 기품 있는 '수라상의 철학'이 흐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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