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해물김치 속 가자미와 오징어: 척박한 태백산맥이 구축한 '천연 단백질"
K-Food 김치 뿌리 29 : 명태와 대구가 통째로? 강원도 '해물김치'의 역사
한겨울 매서운 바닷바람이 몰아치는 동해안의 어시장 골목을 거닐다 보면, 꾸덕꾸덕하게 말라가는 '명태'와 '오징어'들이 장관을 이룹니다. 저는 강원도 속초의 한 식당에서 붉게 양념 된 가자미 조각을 먹으며 작은 호기심에 피었습니다.
새우젓 국물이나 멸치 액젓을 '조미료'처럼 사용하는 남쪽 지방과 달리, 왜 강원도 사람들은 이토록 큼직한 생선 덩어리를 통째로 배추와 무 사이에 욱여넣고 발효시켰을까요?
제가 찾아본 해양 수산 문화와 옛 문헌의 기록 속에는, 척박한 태백산맥을 등지고 깊고 푸른 동해를 품어 안아야 했던 강원도 사람들의 눈물겹고도 지혜로운 생존의 밥상이 차려져 있었습니다.
액젓 대신 생선 덩어리, '식해'의 발달
우리나라의 젓갈 지도를 크게 나누어보면, 서해안은 조수 간만의 차를 이용해 잡은 새우로 맑은 새우젓을 담갔고, 남해안은 따뜻한 기후 탓에 김치가 쉬는 것을 막고자 멸치 진젓을 강하게 썼습니다.
그렇다면 동해안은 어떨까요? 수심이 깊고 맑은 동해에서는 명태, 오징어, 대구, 가자미 등 덩치가 크고 살이 두툼한 어종이 주로 잡혔습니다.
이 큼직한 생선들은 푹 삭혀서 액체 즉, '액젓'로 만들기에는 적합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강원도 해안가 사람들은 생선을 큼직큼직하게 썰어 소금에 절인 뒤, 조밥이나 좁쌀 같은 곡물과 무채, 고춧가루를 한데 버무려 삭히는 '식해' 문화를 눈부시게 발달시켰습니다.
발효가 진행되면서 곡물의 탄수화물은 단맛을 내고 생선의 단백질은 쫄깃한 식감과 폭발적인 감칠맛을 내어, 그 자체로 완벽한 '해물김치'가 탄생한 것입니다.
버릴 것이 하나 없는 명태의 기적, '서거리젓'
특히 강원도 사람들에게 '명태'는 바다가 내어준 가장 위대한 구황 식량이었습니다. 1900년대 초반의 기록들을 살펴보면 강원도 지방에서는 명태 살을 썰어 넣은 명태식해뿐만 아니라, 명태의 아가미를 떼어내어 깍두기나 무채와 함께 버무려 삭힌 '서거리젓'을 겨울철 최고의 별미로 꼽았습니다.
아가미는 오독오독 씹히는 연골의 식감이 뛰어나며 뼈 주위에 붙은 붉은 핏기가 발효되면서 김치 국물에 말로 다 할 수 없는 깊고 진한 시원함을 부여합니다.
또한, 명태의 창자로 만든 창란식해나 알로 만든 명란젓 역시 강원도 삼척, 속초 등지에서 무김치와 함께 발효되며 겨울철 서민들의 식탁을 풍성하게 채워주는 든든한 단백질 공급원이 되었습니다.
동해안 해물김치가 특별한 3가지 이유
단백질 덩어리: 맑은 액젓이 아닌 명태, 가자미, 오징어 살을 통째로 썰어 넣어 씹는 맛이 극대화됩니다.
곡물 발효의 마법: 조밥, 좁쌀 등의 탄수화물이 생선과 섞여 유산균의 먹이가 되며 비린내를 완벽히 지워냅니다.
이중 식감의 조화: 배추와 무의 아삭함, 삭힌 생선 살의 쫄깃함이 한 입에서 동시에 터져 나옵니다.
동해의 바닷바람이 빚어낸 천연 저장고
이토록 생물 생선을 김치 속에 듬뿍 넣고도 부패하지 않게 삭혀낼 수 있었던 것은 강원도 특유의 기후 덕분이기도 합니다. 태백산맥을 넘어오는 차갑고 건조한 겨울 바람은 김칫독의 온도를 유해균이 번식할 수 없는 0~5℃ 사이로 일정하게 유지해 주었습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소금이 귀했던 산간 고랭지나 일부 어촌에서는 배추를 절일 때 값비싼 소금을 사는 대신 바닷물을 길어다 배추를 숨죽이는 지혜를 발휘했다는 것입니다.
바닷물 속의 풍부한 미네랄과 마그네슘이 배추의 조직을 단단하게 잡아주어, 생선 살이 완전히 삭아 내릴 때까지 최장 3~4개월의 긴 시간 동안 배추가 허물어지지 않고 꼿꼿한 식감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젓갈 김치와 해물김치 차이
주 사용 어종
'남도 지방'은 멸치나 갈치 등을 뼈째 삭힌 액젓 형태로 사용하지만,
'강원도 동해안 지방'은 명태, 오징어, 대구, 가자미 등의 생선을 큼직한 덩어리 형태로 썰어 넣습니다.
발효의 조력자
'남도 지방'은 찹쌀풀과 짙은 고춧가루를 넣어 발효를 돕습니다. 그러나,
'강원도 지방'은 좁쌀이나 조밥 등 곡물 알갱이를 섞어 발효시키는 식해 방식을 활용합니다.
김치의 식감
'남도 김치'는 국물이 진득하고 채소의 아삭함이 위주가 됩니다. 반면,
'강원도 해물김치'는 무의 아삭함과 생선 살의 쫄깃함이 섞여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풍미의 특징
'남도 김치'는 혀를 찌르는 강렬하고 묵직한 젓갈의 감칠맛과는 달리,
'동해안 해물김치'는 짜지 않고 담백하며 생선 육수처럼 시원한 맛을 냅니다.
생활 꿀팁
집에서 가자미식해나 명태식해가 들어간 강원도식 해물김치를 구매하셨다면, 차가운 김치냉장고에서 꺼내 상온에 약 10~15분 정도 두었다가 드시는 것이 좋습니다.
너무 차가운 상태에서는 생선 살의 기름기와 단백질이 굳어있어 감칠맛이 잘 느껴지지 않지만, 온도가 살짝 올라가면 삭힌 생선 특유의 고소한 "지방과 아미노산이 활성화' 되어 미각을 훨씬 더 풍성하게 자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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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선을 통째로 넣으면 김치에서 비린내가 걱정됩니다.
발효 초기에는 특유의 바다 냄새가 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조밥 같은 곡물의 당분과 고춧가루, 마늘, 생강이 유산균 폭발을 유도하여 약 15일 이상 푹 숙성되고 나면, 비린내는 마법처럼 사라지고 깊은 사골 육수 같은 시원한 감칠맛만 남게 됩니다.
서거리젓은 명태의 어느 부위인지 알아봅시다.
'서거리'는 강원도 방언으로 명태의 아가미를 뜻합니다. 아가미는 불순물을 거르는 기관이라 굵은소금으로 아주 박박 치대어 씻은 뒤, 무채와 고춧가루를 듬뿍 넣어 약 2개월 이상 삭히면 꼬독꼬독한 식감이 일품인 고급 젓갈 김치가 됩니다.
강원도 정선, 평창 등 산간 지방의 해물
보부상들이 대관령 등 험한 산길을 넘어 지게에 지고 온 반건조 생선이나 염장 생선을 활용했습니다. 바다와 먼 탓에 싱싱한 해물 대신 꽁치살이나 '마른 명태' 또는 말린 명태의 다른 이름인 '황태'를 찢어 김치에 넣고 산채와 나물를 함께 발효시키는 독특한 내륙형 해물김치도 발달했습니다.
거친 파도를 뚫고 건져 올린 생명력을 차가운 항아리 속에서 아삭한 무채와 함께 버무려낸 선조들. 강원도의 해물김치는 가혹한 자연을 맛있는 밥상으로 승화시킨 기적의 결정체입니다.
오늘 저녁, 잘 삭은 명태식해 한 점을 따뜻한 흰 쌀밥 위에 척 올려 드실 때 굽이치는 대관령 고개를 넘어 동해의 차갑고도 푸른 생명력을 밥상 위로 옮겨 오려 했던 강원도 사람들의 지혜로운 삶의 흔적을 깊이 음미해 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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