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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와 즐기는 배동치미와 냉면 - 고종 황제도 즐겼다고?

관리자
2026년 3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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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Food 뿌리 10] 고종의 상동 - 고종 황제가 사랑한 배동치미와 냉면의 인문학

망국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우던 구한말[舊韓末, The late period of the Joseon Dynasty], 외세의 압박 속에서 밤잠을 이루지 못했던 한 군주가 있었습니다. 조선의 제26대 왕이자 대한제국[大韓帝國, Korean Empire]의 제1대 황제였던 고종[高宗]입니다. 국가 제사에 오르는 화려한 제찬[祭饌, Ritual food]이나 값비싼 해산물이 듬뿍 들어간 궁중 김치도 그의 타는 속을 달래주지는 못했습니다. 역사의 기록을 살펴보면,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던 고종 황제에게 가장 큰 위로가 되어준 음식은 다름 아닌 시원하고 달콤한 '배동치미[Bae dongchimi, Pear radish water kimchi]'와 이를 활용한 '냉면[Naengmyeon, Cold buckwheat noodles]'이었습니다. 한 그릇의 차가운 국수 속에 담긴 군주의 고독과 식문화의 역사를 따라가 보았습니다.


1. 화려한 궁중 김치와 달랐던 황제의 야참

조선 왕실의 일상적인 김치인 젓국지[Jeotgukji, Seafood kimchi]나 장김치[Jangkimchi, Soy sauce kimchi]는 10년 이상 묵힌 귀한 궁중 간장을 쓰거나 전복, 굴, 낙지 등 값비싼 식재료가 총동원되는 화려한 음식이었습니다
[국가유산사랑, 2014].
하지만 고종이 불면증에 시달리며 야참[夜站, Late-night snack]으로 찾았던 김치는 이와는 결이 달랐습니다.

고종은 겨울에는 설렁탕[Seolleongtang, Ox bone soup]과 온면을, 여름에는 시원한 냉면을 야참으로 즐겼습니다[세종경제뉴스, 2017].
특히 냉면의 육수로 쓰인 것은 고기 육수가 아니라, 배[梨, Pear]를 듬뿍 넣어 아주 달고 시원하게 담근 '배동치미'였습니다 [국가유산사랑, 2014].
[더 알아보기]
자극적인 맛을 피하고 담백함을 추구하는 수라상[水剌床, Royal table]의 기본 원칙을 따르면서도, 답답하고 꽉 막힌 황제의 속을 뻥 뚫어주기 위해 고안된 맞춤형 발효 국물이었던 셈입니다.

핵심 포인트

고종 황제의 배동치미 냉면 특징

- 육수: 고기 육수 대신 맑고 단맛이 강한 '배동치미' 국물 사용
- 고명: 십자(十) 모양으로 고기를 배열하고 잣[Pine nuts]을 수북하게 덮음
-모양: 배를 칼로 썰지 않고 숟가락으로 떠서 '초승달[Crescent moon]' 모양을 냄


2. 후궁 삼축당이 전하는 숟가락과 초승달의 미학

고종 황제가 즐겼던 이 특별한 배동치미 냉면의 생생한 묘사는, 다행히도 그를 가까이서 모셨던 8번째 후궁 삼축당[三祝堂, Samchukdang] 김씨의 구술 기록을 통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세종경제뉴스, 2017].

삼축당의 회고에 따르면, 고종의 냉면은 꾸미(고명)로 편육과 배, 잣을 면 위에 가득 덮어 장식하는 것이 특징이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배를 깎을 때 일반적인 방식처럼 칼로 반듯하게 써는 것이 아니라, 숟가락으로 한 입 크기씩 파내어 초승달 모양으로 만들어 소복하게 덮었다는 사실입니다[세종경제뉴스, 2017].

이렇게 하면 배의 조직이 으깨지면서 단물이 동치미 국물과 더욱 잘 어우러져, 씹는 식감과 국물의 담백함이 극대화되는 미식의 원리가 숨어 있었습니다.


3. 궁궐 밖에서 배달시킨 '냉면 사리'

자료를 분석하면서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산해진미를 다룰 수 있는 궁중의 수라간[水剌間, Royal kitchen]을 두고도 고종이 냉면 사리(국수)만큼은 궁궐 밖에서 사 오게 했다는 기록입니다.

19세기 초 한양[Hanyang, Old name for Seoul] 도성에는 이미 냉면 전문점들이 성행하며 백성들의 인기 외식 메뉴로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음식과사람, 2021]
순조[純祖] 임금 시절에도 당직을 서는 군사들을 불러 궐 밖에서 냉면을 사 오게 하여 함께 먹었다는 일화가 전해지는데, 고종 역시 궐 밖의 면을 즐겼습니다.[아시아경제, 2018]
이는 군주가 궐 밖 백성들의 역동적인 시장 식문화를 수용하고, 평범한 한 그릇의 국수를 통해 팍팍한 황제의 무게를 잠시나마 내려놓고자 했던 인문학적 애환이 엿보이는 대목입니다.

구분조선 왕실의 보편적 김치고종의 야참용 배동치미
성격권위와 풍요를 상징하는 화려한 젓국지, 섞박지불면의 밤, 화병(스트레스)을 식히기 위한 치유의 음식
재료해산물, 잣, 밤, 표고 등 진귀한 재료 총동원무, 배(초승달 모양), 소금, 잣을 위주로 한 단순함
감칠맛과 짠맛, 화려한 복합미자극적이지 않고 달콤하며 가슴이 뚫리는 시원한 청량감

겨울철 냉면 전문점에 가면 살얼음이 낀 동치미 국물을 섞어 내어주는 평양냉면[Pyongyang naengmyeon]을 맛볼 수 있습니다. 슴슴한 국물을 들이켤 때, 나라를 잃어가는 슬픔 속에서 이 시원한 국물 한 모금으로 숨을 돌려야 했던 고종 황제의 마음을 상상해 본다면 그 맛의 깊이가 훨씬 무겁게 다가올 것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

Q1: 다른 조선 임금들도 냉면이나 동치미를 즐겨 먹었나요?

네, 조선 후기 임금들에게 냉면은 친숙한 별미였습니다. 23대 순조[純祖]를 비롯해 철종[哲宗] 역시 냉면을 무척 좋아하여 칠월 칠석에 냉면을 먹고 체했다는 『일성록[日省錄]』의 기록이 있을 정도입니다.[음식과사람, 2021]

Q2: 왜 밤에 굳이 차가운 배동치미 냉면을 먹었을까요?

구한말의 혼란스러운 정치 상황 속에서 고종은 극심한 스트레스와 불면증에 시달렸습니다. 한의학적으로 가슴에 찬 화[火]를 내리고 속을 편안하게 돕는 천연 소화제 역할을 동치미 국물과 배가 해주었기 때문입니다.

Q3: 당시 궁중에는 얼음이 있었나요?

물론입니다. 조선은 동빙고[東氷庫]와 서빙고[西氷庫]라는 국가 주도의 얼음 저장 시설을 갖추고 있었으며, 왕실에서는 여름철에도 겨울에 저장해 둔 얼음을 동치미나 식혜[Sikhye, Sweet rice beverage] 등에 띄워 차갑게 즐길 수 있었습니다.


마무리

아무리 진귀하고 훌륭한 발효 과학으로 무장한 궁중 김치라 할지라도, 나라의 운명이 흔들리는 격동기에는 황제의 타들어 가는 속을 온전히 위로할 수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핵심 정리

- 배동치미의 치유력: 고종 황제는 불면증이 심한 밤, 차갑고 달콤한 배동치미에 냉면을 말아 먹으며 마음을 달랬습니다.
- 초승달 모양의 배: 숟가락으로 툭툭 퍼낸 초승달 모양의 배는 단맛을 잘 우러나게 하는 훌륭한 조리 비법이었습니다.
- 백성의 음식과의 교감: 궐 밖에서 냉면 사리를 사 오게 한 기록은 서민의 식문화가 왕실의 입맛까지 사로잡았음을 증명합니다.

우리가 고깃집이나 식당에서 무심코 들이켜는 시원한 동치미 국물 한 그릇 속에는 이렇듯 수백 년 전 뜬눈으로 밤을 지새워야 했던 한 군주의 쓸쓸한 숨결이 녹아 있습니다. 오늘 저녁, 시원한 동치미를 마주하게 된다면 그 청량감 속에 담긴 역사의 묵직한 서사를 한 번쯤 곱씹어 보시길 바랍니다.


참고 자료

세종경제뉴스 (고종, 냉면으로 불면증 달랬다)
아시아경제 (조선시대 임금들이 먹던 냉면은 어떤 냉면이었을까?)
문화재청 국가유산사랑 (맛과 멋, 영양까지 살린 궁중김치)
음식과사람 (서민 음식에서 양반의 별미 거쳐 임금의 외식 메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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